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쿠투조프 (문단 편집) === 조국전쟁에서의 쿠투조프 === [[대륙 봉쇄령]] 이후 타격을 받은 러시아가 너무나도 분한 나머지 나폴레옹을 씹고 [[영국]]과 놀기 시작하자, 1812년 나폴레옹은 유례없는 70만 대군을 일으켜 [[러시아]]를 침공했다.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르클라이 드 톨리[* 스코틀랜드계 조상을 두었으며 발트 지역 태생이다.]는 [[청야전술]]을 채택하여 실행에 옮기고자 했지만, [[표트르 바그라티온]] 같은 여러 장군들의 반발을 사고[* 바클라이 드 톨리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둥의 소리를 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드 톨리가 등용한 독일 장교([[클라우제비츠]]도 복무했다.)가 너무 많다는 투정과 '''러시아스럽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엄청나게 까인 다음, 황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르 1세 탓이 컸는데 평소 쿠투조프를 음흉한 노인네라고 의심했고 군사분야에 문외한이지만 전권을 누구에게도 주려 하지 않아서 국방장관이며 1군을 지휘하는 드 톨리를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2군을 지휘하는 바그라티온이 대놓고 그의 명령을 거부하며[* 작위, 계급, 가문 모두 바그라티온이 한수 위에 당시 러시아 전통파들의 외국인 혐오증에다가 전술적으로 대립이 컸다. 황제에게 직접 저런 겁쟁이의 명령을 듣느니 일개 연대장으로 복무하겠다고 최후통첩까지 보냈다.] 황제에게 못해먹겠다고 항명을 부렸고 합동작전도 어려웠다. 사실 이 당시 러시아 군 수뇌부는 드 톨리를 위시한 외국인파와 러시아 전통파들 대립이 컸기 때문에[* 드 톨리는 러시아인이지만 외국계고 러시아 귀족 중엔 발트 독일인 계열 귀족도 많은데다가 나폴레옹 전쟁 시기 독일에서 망명한 군인들, 프랑스 왕당파 망명자 등 다양했다.] 외국인파와 귀족파 장교들이 날이면 날마다 대가리 터지게 싸웠고 알렉산드르 1세는 이를 이용했다. 애초에 드 톨리를 임명한 것도 "이래저래 간섭말고 일선지휘관을 임명하시죠." 라는 건의 때문에 만만한 바지사장 드 톨리를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 애초에 쿠투조프 정도의 경력과 전공이 아니면 총사령관 감은 없었다. 결국 바지사장(?) 드 톨리를 총사령관에서 해임하고 겸임하던 1군 사령관은 유임시킨 후 쿠투조프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이 때 쿠투조프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황제가 아우이자 황태제인 콘스탄틴 대공[* 황제의 아우이면서 황실을 대표해서 군을 맡았는데, [[귀천상혼]] 탓에 알렉산드르 1세 사후에 계승권을 포기하고 폴란드 총독으로 복무한다. 제위를 계승한 건 17세 연하 동생인 [[니콜라이 1세]].]을 기용해서 지휘권을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락한다.[* 이런 조건을 듣고 임명할 때 황제는 매우 화가 났었다고 한다. 애초에 러시아 전통파 군인들과 귀족들을 조종하는 게 쿠투조프가 아니었나 의심하기도 했다.] 쿠투조프가 총사령관이 되어 8월 17일 러시아군 본대와 합류했을 때 모두가 그를 반겼고, 쿠투조프는 기본 방침은 변경하지 않은 채 점점 나폴레옹을 질질 끌고 다니면서 그의 전력을 계속해서 소모시켰다. 그러던 중 9월 초 러시아군은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11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보로디노에 도착했고, 근성으로 뒤따라온 나폴레옹군과 한바탕 싸우게 되었다([[보로디노 전투]]).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20만이 넘는 병력과 600문 이상의 대포를 가지고 개전했으며 그 결과는 나폴레옹마저도 '''너무나도 끔찍했다'''고 할만큼 매우 참혹했다고 기록한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절반 가까이 괴멸하는 타격을 입었지만 아직 러시아군의 가용 병력은 건재했고, 프랑스군은 전투에 참여한 병력의 4분의 1을 손실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청야전술의 일환으로 모스크바를 버리고 모든 시민에게 모스크바를 떠나게 했다. 칼루가 도로를 따라 퇴각하며 물자를 보급받은 쿠투조프는 나폴레옹을 도발하여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프랑스군은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체적인 국면은 이미 러시아의 승리로 굳어져 가고 있었고 식량 부족과 굶주림에 지친 프랑스 수뇌부는 결국 퇴각을 결정한다. 이후 러시아군은 승세를 타고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는 가운데 덮친 엄동설한과 [[카자크]] [[기병]]대의 습격과 분노한 러시아 [[농부]]들의 공격을 받아 점점 그 수가 줄어들어, 690,000명의 대육군 중 극히 적은 숫자인 93,000명만이 살아서 [[프로이센 왕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쿠투조프는 야전 원수의 직위에 올랐고, 1812년 11월에 [[스몰렌스크]]에서 남아있던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고귀한 스몰렌스크 공작 전하(Светлейший князь Смоленский)라는 영광스러운 명칭을 받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